
프로농구 안양 KGC인삼공사 김상식 감독의 30여년 농구 인생은 그늘진 비탈길이었다. 선수와 지도자, 행정가로 모두 대성한 부친의 발자국은 그만큼 크고 깊었다. 승자와 거리가 먼 선수 생활을 보냈고, 지도자 변신 이후엔 정식 감독 문턱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그런 그가 마침내 웃었다. 마음을 비우고 원점에서 새로 출발한 첫해. 그토록 염원하던 정상에 우뚝 섰다. 한 번도 아니고 세 차례나 팀을 가장 높은 곳으로 이끌었다. 개인으로서도 리그 최고 감독의 영예를 안았다. 통합우승이란 좁은 문을 지나 한국 농구사에 이름 석 자를 각인했다.
무관의 이동 미사일, 안양서 피운 꽃
현역 시절 김 감독의 별명은 ‘이동 미사일’이었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실업리그와 초기 프로농구를 거치며 정교한 외곽슛을 자랑하는 명품 슈터로 활약했다. 실제 KBL 리그 원년이었던 1997년엔 경기당 20.3점을 홀로 책임지며 광주 나산의 간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국내 선수 4위에 해당하는 뛰어난 기록이었다.
그러나 ‘최고’와는 거리가 있었다. 개인 기록으로든 팀 성적으로든 마찬가지였다. 실업리그 약체였던 기업은행 시절은 물론 프로 출범 이후에도 우승과 연이 닿지 않았다. 나산과 안양 SBS에서 뛴 7시즌 동안은 아예 챔피언결정전 문턱도 못 밟았다.
은퇴 후 지도자 연수를 받고 인생 2막을 여는가 싶었지만 이 또한 녹록지 않았다. 오히려 좌절의 횟수와 정도로 따지면 현역 때보다 더했다. 프로에서만 세 차례 감독대행을 맡았다. 실제 감독으로 승격된 건 2008-2009시즌 한 번뿐이었다. 그마저도 성적 부진에 한 시즌을 다 못 채우고 사퇴했다. 국가대표팀에서도 기구한 운명은 이어졌다. 대행을 거쳐 정식으로 대표팀 감독에 올랐으나 코로나19 시기 선수 선발을 두고 잡음이 일자 직접 자리에서 물러났다.
변화는 지난해 시작됐다. 농구계를 떠나 야인으로 돌아갈 생각까지 하던 그를 KGC 구단 측에서 만나자고 했다. 팀의 중흥을 이끈 사령탑과 결별한 KGC는 김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기기로 했다.
결과는 모두가 알듯 대성공이었다. 주포 전성현의 이적이 무색하게 KGC는 압도적인 면모를 보이면서 와이어 투 와이어(처음부터 끝까지 1위)로 정규리그를 제패했다.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면서 동아시아 슈퍼리그(EASL) 우승도 챙겼고, 마지막엔 챔피언결정전 우승까지 차지했다.
김 감독은 지난 13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감격의 순간을 어제 일처럼 되짚었다. “처음엔 멍했다가 코치들이 우는 걸 보고 실감했다. (국가) 대표팀을 나온 과정이라든지, 그간의 일들이 머릿속을 차례로 스쳐 갔다. 남 얘긴 줄로만 알았는데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실감이 안 나서 다음 날 아내에게 이게 현실이 맞느냐고 물었다.”
‘내 탓’이 이겼다
김 감독의 온화한 리더십은 지난 시즌 내내 화제였다. 카메라 앞에선 호통을 최대한 자제했고 전술 미팅 때도 단점보다 장점을 강조했다. “우리가 잘하는 걸 하자”는 게 그의 단골 멘트였다.
그는 이 같은 지도 방식이 역경의 연속이었던 지난 나날을 통해 얻은 교훈이라고 했다. 김 감독은 “보통 감독대행을 맡아보면 선수들이 위축돼 있기에 십상이다. 팀 상황도 안 좋고, 괜히 자신들 때문에 전임 감독이 나간 게 아닌가 싶기 마련”이라며 “다그치기보다 독려하고 칭찬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선수들을 인격적으로 배려하는 마음은 곧 경기력에 대한 고민과도 맞닿아 있었다. 심적으로 위축된 상황에서 제 기량이 나오기 어렵다는 지론이다. 그는 “연습 땐 지적을 많이 한다. 억누르는 게 쉽지 않을 때도 있다”면서도 “선수들도 다 큰 성인인데 팬들 보는 앞에서 혼나면 얼마나 창피하겠느냐”고 말했다. 더불어 “어떤 지도 방식이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 번 이렇게 (부드럽게) 가보자고 했는데 맞아떨어졌을 뿐”이라고 몸을 낮췄다.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도 그의 선택은 비슷했다. 김 감독은 선수 시절부터 ‘김영기의 아들’로 주목을 받았다. 1960년대 실업 리그 스타였고 국가대표 지도자로도 굵직한 업적을 남긴 부친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롭기란 쉽지 않았다. 더구나 김 감독 현역 막바지와 은퇴 이후엔 부친이 KBL 총재를 역임하면서 그늘도 더 짙어졌다.
여건이 원망스러워 주저앉을 법도 했지만 그는 정반대의 얘길 했다. 남을 탓하지 않았기에 다시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 감독은 “감독대행을 하면서 ‘다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니 더 노력해야겠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더라”고 털어놨다.
우승 직후 부자(父子)간 어떤 얘길 나눴느냐는 질문에 김 감독은 “고생 많았다, 수고했다고 하시더라. 저희가 닭살 돋고 살가운 스타일은 아니다”라며 멋쩍게 웃었다. 그는 이내 “어머니를 통해 듣기론 (부친이) 그간 미안한 감정이 있으셨는데 많이 기뻐하셨다더라”고 덧붙였다.
다시 처음으로
승리의 감동을 만끽할 시간은 짧았다. 코트에 땀이 마르기도 전에 우승 주축 선수들과 결별이 잇따랐다. 캡틴 양희종은 현역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고 변준형은 입대했다. 프랜차이즈 스타로 각각 공·수의 기둥과 같았던 오세근과 문성곤은 이적을 택했다. 정효근 최성원 이종현을 영입했지만 객관적으로 손실이 소득을 압도했다. 최고의 성적을 거둔 감독에게 안기는 우승 선물치곤 박해도 한참 박했다.
충분히 야속할 법하지만 김 감독은 내색하지 않았다. “원래 감독대행을 상황 안 좋을 때 하지 않느냐”며 농부터 던졌다. 이어 쏟아낸 건 새 제자들에 대한 칭찬이었다. “정효근과 최성원, 이종현까지 모두 다 좋은 선수들이다. 이종현은 본인이 먼저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하겠다고 연락해왔다. 말에 그치지 말고, 한번 보여주라고 했다.”
그는 ‘처음’을 말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해보려 한다. 방법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새 선수가 들어왔다고 해서 팀 분위기를 바꾸진 않을 거다. 마음먹었던 대로 하겠다.”
여러 전문가가 이번 FA 시장을 결산하며 KGC를 가장 전력 낙폭이 큰 팀으로 꼽았다. 김 감독 본인도 6강 진입을 새 시즌 목표로 내세웠다. 사실 지난 시즌 직전에도 KGC는 우승 후보가 아니었다. 전성현의 이적으로 전력이 약해졌다는 평이 잇따랐고 중위권 전력이란 시각이 중론이었다.
1년 새 주전 대다수의 얼굴이 바뀌게 됐지만 한 가지 그대로인 건 김 감독의 지도력이다. 다시 한번 드라마 같은 시즌을 꿈꾸는 KGC의 열쇠도 오직 거기에 있다.
송경모 기자 sso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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